오쓰 아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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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쓰 아쓰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포수와 외야수로 활동했다. 아카시 고등학교 시절 포수로 1947년 춘계 선발 대회에 출전했고, 간사이 대학에서는 외야수로 전향하여 리그 우승을 세 번 이끌었으며 '미스터 간사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닛폰 생명에서 사회인 야구 선수로 활약한 후, 1955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 우승을 경험했다. 1956년부터 1961년까지 한신 타이거스에서 외야수로 뛰며, 통산 631경기, 타율 0.246, 24홈런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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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 아쓰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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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선수명 | 오쓰 아쓰시 |
로마자 표기 | Atsushi Otsu |
한자 표기 | 大津 淳 |
가나 표기 | おおつ あつし |
출생지 | 효고현 아카시시 |
생년월일 | 1932년 1월 2일 |
사망일 | 2020년 11월 13일 |
사망 당시 나이 | 88세 |
신장 | 171cm |
체중 | 74kg |
利き腕 | 오른손 |
타석 | 오른손 |
수비 위치 | 외야수 |
프로 & 아마 경력 | |
고등학교 | 효고현립 아카시 고등학교 |
대학교 | 간사이대학 |
실업팀 | 일본생명 |
프로 입단 연도 | 1955년 |
소속팀 | 오사카 타이거스 한신 타이거스 (1956년 - 1961년) |
첫 출장 | 1956년 3월 21일 |
마지막 출장 | 1961년 10월 18일 |
2. 선수 경력
아카시 고등학교(구제 아카시 중학교) 시절에는 포수로서 1947년 춘계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1차전에서 도쿠시마 상업고등학교에 패했다.[5][1] 졸업 후 간사이 대학에 진학하여 외야수로 전향했다. 간사이 6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재학 중 팀의 우승을 세 차례 이끌었다. 1953년 춘계 리그에서는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하며 ‘미스터 간사이’(미스터 간로쿠)라는 별명을 얻었다.[2] 리그 통산 93경기에 출전하여 319타수 102안타, 타율 0.320, 3홈런을 기록했다.
프로 구단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닛폰 생명에 입사하여 회사 내 사회인 야구팀에서 활동했다. 1955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는 젠카네보(전 가네보)의 보강 선수로 출전했다. 준결승전에서 결승 2루타를 치는 등 중심 타자로 활약했고, 결승전에서 가네가후치 화학을 꺾고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6][2] 같은 해 세계 아마추어 야구 대회 일본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2. 1. 프로 선수 시절 (한신 타이거스)
1955년 12월 한신 전기철도에 입사했고, 파견 형태로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했다.[7] 이듬해인 1956년부터 주전 외야수로 출전하기 시작했다. 1957년에는 타격 10위권에 진입하며 리그 8위(타율 .262)를 기록하는 등 좋은 성적을 남겼다. 1960년에는 한 경기에서 포수로 기용되기도 했다. 1961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7]3. 은퇴 이후
1961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한신 전기 철도로 돌아갔다. 이후 한신 타이거스 구단 프런트로 자리를 옮겨 영업 부장, 편성 부장 등을 역임했다. 1985년에는 영업 부장으로서 구단 역사상 첫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4]
2020년 11월 13일 13시 50분, 폐렴으로 인해 아카시시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4]
4. 상세 정보
(내용 없음)
4. 1. 출신 학교
- 효고 현립 아카시 고등학교
- 간사이 대학
4. 2. 선수 경력
아카시 고등학교(구제 아카시 중학교) 재학 시절에는 포수로서 1947년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봄 고시엔)에 출전했다. 1회전에서 도쿠시마 상업고등학교에 패했다.[1] 졸업 후 간사이 대학에 진학하여 외야수로 전향했다. 간사이 6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재학 중 3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1953년 춘계 리그에서는 수위 타자를 차지하며 '미스터 간로쿠'(간사이 6대학 리그의 약칭)라는 별명을 얻었다. 리그 통산 성적은 93경기 출장, 319타수 102안타, 타율 .320, 3홈런이다. 프로 구단의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고 일본 생명에 입사했다. 1955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는 가네보 팀의 보강 선수로 출전하여, 준결승에서 결승 2루타를 치는 등 중심 타자로 활약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2] 같은 해 세계 아마추어 야구 대회 일본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1955년 12월, 한신 전기 철도에 입사하여 파견 형태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다.[3] 이듬해인 1956년부터 주전 외야수로 경기에 출장했으며, 1957년에는 타율 .262를 기록하며 타격 부문 8위에 오르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60년에는 한 경기에서 포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1961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3]
4. 3. 개인 기록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1956년 3월 21일, 히로시마 카프 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5번·우익수로 선발 출장, 4타수 3안타 2타점 1도루
- 첫 홈런: 1956년 3월 21일, 히로시마 카프 2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4회말에 마쓰야마 노보루를 상대로 솔로 홈런
- 올스타전 출장: 2회 (1956년, 1958년)
4. 4. 등번호
- '''19''' (1956년 ~ 1961년)
4. 5. 연도별 타격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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